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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1일 목요일

성매매 금지와 파시즘

소위 '성매매방지법'이라는 것이 제정된지도 1년이 지났다. 성매매방지법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성'을 상품으로, 그래서 화폐를 통한 교환대상으로 삼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법이 제정될 당시는 물론 이거니와 현재까지도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거의 터부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아마도 가장 많이들 언급하는 주제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김대중 정권이래 지금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여성부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과거 정권에서 '안기부'의 모습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곤한다. 아니 때로는 안기부보다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 안기부의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갔지만, 안기부의 권력이 우리들의 내면까지 지배하지는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시대가 바뀌면서 상당수가 '민주인사'라는 화려한 날개를 얻으며 부활하기 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성부에 찍히거나, 그들이 제정한 법에 의해 걸려들기라도 하면,,,그들은 그 순간 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그들의 인생은 거기서 거의 끝장난다.

거기에 더해서, 요즘 소위 인텔리 계층과 진보세력을 아우르는 공통의 전제는 바로 '여성'이다. 그런 이유로, '여성'과 관련된 그 어떤 담론에서도 그들은 지나치리만큼 헌신적이며, 충성스러우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시즘적이다'

최소한 '여성'은 현실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인 '담론'의 영역에서 이미 절대권력을 잡고 있으며, 이 담론은 '논리 이전의' '윤리적 영역'에서의 암묵적으로 합의된 '자명성'을 기반으로해서, 기타의 다른 모든 담론들을 평가/비판/제정립 할 수  있는 초월적 위상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제 다음 시대의 철학은 바로 '여성학'이 될 가능성마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초월적/선험적 담론'과 '파시즘'을 구별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은 현상적으로 볼 때, 너무도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마치 철학자가 독재자와 그리도 같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두 담론은 서로 상사적이다. 즉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담론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이 두 담론들은 당대의 다른 모든 다른 담론들을 평가/비판/재정립 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담론이 초월적 담론으로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그 담론이 다른 모든 담론들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근원성','보편성'마저 때로는 '정치적' 술수에 의해 기만될 수도 있으며, 사실 때로 상대적일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담론이 초월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고 오류의 위험을 최소화핧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자기비판성'인 것이다. 즉 자기 자신조차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한에서, 그리고 그런 자기 비판에서 검증되는 한에서 그 담론은 초월성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소한 현대사회에서의 '정치적 정의'라는 말과개념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소한 우리에게 알려진 정의라는 것은 늘 자기비판이 아니라 타자비판을 통해서 획득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비판을 상실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오로지 타자들과의 투쟁과 견제 속에서 한시적으로 '정의'라는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마저도 다행인 경우가 많다. 즉, 전적으로 타자비판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승자가 되었을 때, 그 어떤 타자들의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담론은 처음부터 자기 비판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고, 나중에는 타자들에 의한 비판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담론을 바로 '파시즘'이라고 규정해도 좋을 것이다. 일체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비판할 수있다는 것,,,와,,, 이런 상황은 소위 '유아기적 단계'의 의식에서의 이상적 상황이 아닌가?

 '여성의 성은 보호받아야 한다'-- 좋다. 세상의 반은 여성이고, 우리 어머니도 여성이다. 굳이 인권이라는 것을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에도 벗어나는 것이며, 성의 자기 결정권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원리에도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런 주장에 대해서, "그래 너는 자본주의의 맹신자냐?", 혹은  "그래, 너는 늘 성매매를 즐기는 놈이구나" 또는 "그래, 네 엄마, 네 딸이 성매매의 희생자가 되도 좋단 말이냐?" 라고 논박(?)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이런 사람들과는 상종하기 싫다(지금껏 이런 식으로 반박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식의 논박은 전형적인 파시즘적 전력인 것이다. 일체의 내적/외적 비판을 '도덕성'이나 그와 유사한 내면적이고 가치적인 개념을 이용해서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물론자들이 자기 모순을 범하면서까지 자기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반동' 개념의 용법과 하등 차이가 없으며, 종교권력이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이단'개념의 용법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완전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상' 속에서 사유하면 안 되는 것이며, 늘 살아있는 현실 속에서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을 말하더라도, 확실한 대안이 있다면 모를까, 명백한 전체적인 대안도 없으면서 어느 특정 분야와 대상에 대해서 '특권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더이상, '이상주의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철저히 '정치적인' 수작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중세를 '암흑기'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당시의 그 어떤 담론도 '이단'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악법이라 규정하는 것은, 그 내부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다 상위법인 헌법위에 군림한다는 것, 즉 법의 위계를 흔들기 때문인 것이다.

중세의 그 진지했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과연 요즘의 '여성인권'을 걱정하는 사람들보다 덜 진지했을까? 그리고 독재권력 시절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파시즘에 굴복했던가?

누군가 전에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성매매, 그거 도덕적으로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이면, 세상에 뭐가 제대로 되있나요?" , "현재 성인 남성의 42%가 미혼인데, 그들은 다 도나 닦아야 하나요?" "이젠 돈 없어서 능력 없어서 결혼을 못하면, 그짓도 못하게 된 건가요?"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은 이제 완전히 성으로부터 소외되었네요" . "성매매 단속한다면서 서민(?)들이 이용하는 몇몇의 집장촌만 잡는데,, 왜 요정이나 단란주점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나요?" "요즘에는 남자들이 몸파는 노래방도 많은데, 관련법규가 없어서 단속을 못한답니다"

한가지 어처구니 없는 현상하나 지적하자면, 소위 '청소년 보호법'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는 엄격하게 단속되고 있는데, 반대로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청소년들이 '성적 코드'를 통해서 부각되고 있다는 기막힌 '이중성'이다.

나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문득 조지오웰의 '동물농장'과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윤리'라는 책이 떠오른다.

http://cafe.naver.com/samgugjiryak/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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